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80년, 사상 최대의 왜구 결집과 대승 === 1380년은 단순한 침공의 횟수만 따지자면 당시의 몇 년 중에서 비교적 적은 편이었지만, 대신 '''고려가 치른 왜구와의 전쟁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월달에 잠잠했던 왜구들은 2월 현 경상남도 진주시인 영선현(永善縣)을 공격했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보성과 순천을 공격했다. 3월에는 순천의 사찰 [[송광사]](松廣寺)가 왜구에 공격당했고, 광주와 [[화순]] 등이 왜구에 공격당하자 정지, 이원계, 오언 등이 나서서 이를 막기도 했다. 5월에는 '''왜구의 전함 백여 척'''이 결성(結城)과 홍주(洪州)로 쳐들어왔다. 6월에는 정읍현(井邑縣)에 왜구가 쳐들어와 지용기에 이에 맞서 싸웠으며, 7월에는 지용기가 명량향(鳴良鄕)[* 전라북도 김제]에서 왜구와 싸워 포로가 되었던 백여명을 구출하는 사건도 있었다. 또한 서주(西州)를 침공한 왜구들은 이어 부여현(扶餘縣)·정산현(定山縣)·운제현(雲梯縣)·고산현(高山縣)·유성현(儒城縣) 등지를 공격한 후에 [[계룡산]](鷄龍山)으로 들어갔는데, 이 계룡산에는 '''왜구를 피해 피난을 온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많이 있었으나, 왜구의 칼날에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이에 양광도 원수 김사혁이 나서서 이를 쳤으나 왜구는 도망치면서도 계속해서 약탈을 했다. 우왕 역시 계속되는 왜구의 침공에 답답한지 "백성과 사직이 있은 연후에 나라가 있는 법이거늘, 지금 왜적의 침구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하고 '''자신이 직접 왜구를 막으러 가겠다'''고 말했고, 이에 최영이 만류하며 자신이 나가 싸우겠다고 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앞으로 벌어질 일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